노무현의 사람들, 드라마보다 극적인 '10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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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영신문 댓글 0건 조회 16,439회 작성일 19-05-22 11:12본문
도지사 승승장구 '우광재, 좌희정'
불법정치자금·성폭행 불거져 추락
참여정부의 '책사' 이정우·김병준
개혁 전도사로..보수로..정반대 길
'친노 총리' 지낸 이해찬·한명숙
당 대표 뒤 '반전에 반전' 극과 극
FTA 대척점에 선 정태인·김현종
소신 굽히지 않고 활발한 활동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10년, 같은 꿈을 꾸며 그의 주변을 지켰던 이들의 삶도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달라졌다. ‘인간 노무현’은 그가 떠난 뒤로도 여전히 그가 아꼈던 사람들의 삶 곳곳에 머무르며 영향을 끼쳤다. 어떤 이들은 절망을 넘어 성공하고 환호했고, 어떤 이들은 좌절하고 무너지고 때론 돌아섰다. 그들의 엇갈린 운명을 통해 지난 10년을 돌아본다.
문재인, 그리고 이광재와 안희정
‘나까지 정신을 놓으면 안 된다. 정신 차려라. 침착하자.’ 2009년 5월23일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마주한 문재인 변호사는 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 ‘생애 가장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었던’ 그날로부터 8년 뒤 그는 대한민국 19대 대통령이 되었다.
1982년 29살에 노 전 대통령과 부산에서 합동법률사무소를 열며 인연을 맺은 문재인은 참여정부 청와대의 민정수석과 시민사회수석,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 평생의 동지이자 선배였던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그의 인생을 극적으로 바꿔놓았다. 그는 “노 대통령은 유서에 ‘운명이다!’라고 했다. 내 삶도 그런 것 같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외쳤고, 그는 ‘사람이 먼저다’를 내세웠다.
2017년 5월, 대통령 문재인은 취임 직후 맞은 노 전 대통령 추도식에서 “임기 동안 대통령님을 가슴에만 간직하겠다. 현직 대통령으로서 이 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다. 반드시 성공한 대통령이 돼 임무를 다한 다음 다시 찾아뵙겠다”고 다짐했다.
정치에 뜻이 없던 문재인과 달리 ‘우광재, 좌희정’으로 불리며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적자로 꼽혔던 이들의 삶도 ‘롤러코스터’를 탔다. 국회의원 노무현의 첫 보좌관이었던 이광재는 참여정부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지냈다. 2004년과 2008년엔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2010년 지방선거에서 강원도지사에 당선돼 ‘거물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하지만 당선 이듬해 ‘불의의 일격’을 당했다.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 등의 돈을 받았다는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지사직에서 물러났다. 현재 민간 싱크탱크 여시재 원장을 맡고 있다.
안희정의 운명은 더 ‘드라마틱’했다. 그는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 캠프 정무팀장을 지냈다. 대선에서 이겼지만 집권 뒤 곧바로 이어진 대선자금 수사 때 ‘총대’를 메고 감옥에 갔고, 참여정부 내내 어떤 공직도 맡지 못했다. 부채감이 컸던 노 전 대통령은 그를 임기 내내 안쓰러워했다고 한다. 참여정부가 끝날 때 “폐족”을 선언했던 그는 2008년 7월 통합민주당 최고위원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2010년부터 두차례 충남지사에 당선됐다. 2017년 1월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문재인 후보에게 58만여표 뒤진 2위를 기록하며, 확실한 ‘차기 대선 주자’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이듬해 3월 비서 김지은씨를 성폭행한 의혹이 불거지며 추락했다.
이정우와 김병준
참여정부의 이론적 토대를 만들었던 두 학자의 행로도 극과 극으로 갈렸다. 토지보유세 강화를 주장해온 경제학자 이정우 정책실장과, 그 뒤를 이어 종합부동산세 신설을 주도했던 행정학자 김병준 정책실장은 10년 뒤 거의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초대 청와대 정책실장이었던 이정우 한국장학재단 이사장(경북대 명예교수)은 부동산세제 강화, 근로장려세제 도입, 네덜란드식 노사협력모델 제시 등 개혁색 짙은 정책을 이끌며 참여정부 초기 정책의 기틀을 잡았다. 참여정부가 끝난 뒤에도 2012년 문재인 후보 캠프 경제공약을 총지휘했고, 지금도 가장 왼쪽에서 현 정부를 향한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고 있다.
지방분권에 관심이 많고 자유무역협정(FTA) 등 시장 기능에도 긍정적이었던 김병준 정책실장은 참여정부 2년차에 정책의 지휘봉을 잡았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1990년대 설립한 지방자치실무연구소의 소장을 맡을 정도로 오랜 시간 신뢰를 쌓아온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2006년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에도 임명된 뒤 논문 표절 의혹으로 낙마했고, 이후 ‘친노’와 점차 멀어졌다. 2012년 대선에서는 김두관 전 경남지사를 지지하며 친노세력과 각을 세웠다. 그리고 결국엔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태 때 국무총리 후보자로 재등장하며 보수진영과 인연을 맺었다. 지난해에는 자유한국당의 혁신비상대책위원장직까지 맡으면서 친노 인사 중엔 가장 ‘멀리’ 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명숙과 이해찬
참여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대표적 ‘친노’ 인사인 이해찬과 한명숙의 운명도 엇갈렸다. 이해찬은 2006년 3월 ‘3·1절 골프’ 의혹으로 낙마할 때까지 ‘책임총리제’를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노무현 정부에서 ‘실세총리’로 통했다. 그 뒤 2008년 18대 총선에 불출마하고 탈당했다가 2012년 19대 총선에서 세종특별자치시에서 당선돼 국회로 돌아왔다. 같은 해 6월 민주통합당 당대표 선거에서 김한길 후보를 누르고 당대표에 당선됐다.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지냈고, 지난해 8월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다시 당대표로 선출되는 등 지난 10년을 대부분 ‘친노’의 핵심 위치에 머물렀다.
참여정부에서 초대 환경부 장관을 지낸 한명숙은 이해찬과 달리 여러차례 운명적인 고비를 넘어야 했다. 참여정부 때 헌정 사상 첫 여성 총리에 오르는 명예를 누렸지만 뇌물수수 혐의로 수사를 받았고, 수사가 진행 중이던 2010년 6월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하는 승부수를 던졌지만 고배를 마셨다. 2012년 민주통합당 초대 당대표에 선출됐지만 같은 해 4월 19대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넉달 만에 물러났다.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2015년 8월 대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돼 2017년 8월 만기출소했다.
정태인과 김현종
참여정부의 ‘뜨거운 감자’였던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둘러싸고 운명이 갈린 이들도 있다. 노 전 대통령의 경제 가정교사로 불렸던 정태인은 참여정부에서 국민경제자문회의 사무차장, 대통령 직속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 기조실장 등을 맡았다. 2005년 5월 국민경제비서관을 끝으로 자리에서 물러났고, 참여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자 2006년 3월 공개 반대하면서 다른 길을 갔다. 2007년 8월 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2008년 3월 민주노동당을 탈당한 뒤 진보신당 창당에 참여했다. 문재인 후보에 맞서 심상정 후보가 출마했던 지난 대선 때 정의당 정책자문단장을 맡았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기준으로 정태인과 정확히 대척점에 서 있던 이가 김현종이다. 2003년 세계무역기구(WTO) 수석변호사 신분으로 노무현 당선자에게 세계 통상현안에 관해 브리핑한 인연으로 발탁됐다. 참여정부에서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유엔 대표부 대사를 지냈다.
그는 이후에도 삼성전자 해외법무 사장,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세계무역기구 상소기구 위원 등을 지내다 박근혜 정부 말기인 2016년 2월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뒤 통상교섭본부장으로 재임명되어 다시 한-미 자유무역협정 개정 협상을 이끌었다. 그는 지금도 청와대 국가안보실 제2차장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다. 노무현에서 문재인에 이르기까지, 두루 요직을 섭렵하며 ‘탄탄대로’를 걷는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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